본문 바로가기
의견

우주에서 우주를 짓는 사람: 영화 <가가린> 리뷰

by 박산리 2023. 1. 23.


'실감나는 우주'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우주의 크기, 빛의 속도 혹은 블랙홀처럼 도무지 우리가 실감할 수 없는 것들을 실감하도록 돕는 영상이 올라오는 그 채널을 자주 들여다본다. 물론 그 실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감에 도움을 주긴 한다. 우주라는 개념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안도를 느끼는 쪽이다. 먼지라는 이름도 붙지 못할 만큼 미미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만이 효과적으로 불안을 가라앉힌다.

영화 <가가린>의 주인공 유리는 가가린 아파트(Cité Gagarine)에 사는 흑인 소년이다. 1960년대 초 프랑스 파리 외곽 이브리쉬르센 지역에 지어진 이 아파트에는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이 붙여졌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지구 밖으로 나간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소련은 미국보다 뛰어난 우주 기술을 자랑하며 냉전 체제의 세력 재편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미국은 유리 가가린의 우주 여행 이후 소련과의 달 착륙 경쟁을 공식 선언하기도 했으니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소련과 미국의 우주 경쟁은 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러니까 적대 세력에 힘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우주적 시선을 욕망한 것에 가까웠다. 우주 영웅이 되어 돌아온 유리 가가린이 프랑스 어느 도시의 아파트 이름이 된 것도 이러한 욕망의 선 위에 있다.

 

프랑스 공산당 정부가 세운 가가린 아파트는 T자형 붉은 벽돌 건물로 14층에 걸쳐 약 400개의 호실이 들어찬 큰 단지였다. 입주민에게는 주택 보조금이 지원되기도 했다. 영화는 유리 가가린이 이 아파트를 방문한 날을 촬영한 실제 영상 기록으로 시작한다. 프랑스 시민들은 "유리! 유리!"를 외치며 유리 가가린을 활영한다. 유리 가가린은 가가린 아파트에 기념 나무를 심었다. 영화는 곧 유리 가가린에서 가가린 아파트에 사는 유리의 시간으로 건너온다.

유리는 아파트 곳곳을 망원경으로 살핀다. 사람들이 웃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하늘에 뜬 별을 관찰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관찰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유리는 아파트를 수리한다. 조명을 갈고 승강기를 손본다. 소중한 것을 가꾸고 지키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이웃들과 춤을 춘다. 일식이 일어나던 날엔 이웃들이 일식을 지켜볼 수 있도록 장막을 설치해 일식 관측을 선물한다. 사람들은 "유리! 유리!" 외치며 유리에게 감사와 애정을 전한다. 혼자 사는 유리는 혼자가 아니기도 하다. 친구가 있고 이웃도 있다. 이웃이라는 단어가 더이상 친밀감의 표식은 못 되지만, 영화에서 유리는 이웃들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유리는 철거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파트를 고친다. 낡고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는 순간 가가린 아파트는 철거될 것이다. 유리는 가가린의 주민은 아닌, 그렇지만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디아나와 친구가 된다. 디아나는 유리보다 능숙한 사람처럼 보인다. 유리가 아파트 곳곳을 수리하는 걸 지켜보던 디아나는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폐자재 창고로 유리를 데려간다. 아파트를 수리하는 데 쓸 수 있는 온갖 낡은 물건이 쌓여있다. 임대 아파트 단지들에 붙어있었을 간판도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이곳은 "건물의 무덤"이다.

디아나의 꿈은 미국에 있다. 디아나는 그곳에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없는 자유. 디아나는 유리에게 꿈을 묻는다. 유리의 대답 대신 별이 뜬 까만 하늘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유리의 꿈은 우주에 있다.

이 영화에는 우주선은 아니지만 우주선이기도 한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유리가 아파트 옥상 문을 열고 올라갈 때 옥상의 문은 마치 우주선의 문처럼 움직인다. "건물의 무덤"인 거대한 창고는 주황빛으로 채워져 지구의 창고라기 보다는 우주선의 내부 같다. 유리가 자주 시간을 보내는 옥상에는 배기관을 통해 아파트 곳곳의 소리가 전달된다. 유리가 배기관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마치 다른 별과 교신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리의 수고와는 상관없이 가가린 아파트는 안전진단 통과에 실패한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낡은 아파트는 유리의 노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파트를 점검하러 나온 공무원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유리는 왜 멀쩡히 전원이 들어오는 시설물의 점수가 100이 아닌 85인지 물었고 공무원은 에너지 효율이 B등급 이상이어야 하는데 C등급이라 점수를 그리 매겼다고 대답한다. 가가린 아파트는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았다.

유리는 가가린 아파트를 지키는 데 실패했고 주민들은 가가린을 떠났다. 유리에게는 엄마가 있다. 엄마는 사랑을 찾아 떠났다. 엄마는 유리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가가린 철거 전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의 말도 이웃을 통해 들었다. 이 이웃 여성은 유리와 각별한 우정을 주고받는다. 유리가 운전하는 장면이 있다. 자동차의 시동이 연달아 꺼졌고 옆자리에 앉은 이웃은 그저 시동을 다시 걸라고 담담하게, 반복해서 말한다. 유리의 삶이 계속 꺼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시동을 다시 걸라는 응원처럼 들린다.

이웃 여성은 이제 운전을 곧잘 한다며 유리를 칭찬한다. 이 이웃은 유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유리를 지켜봐 왔다. 그러니까 운전을 할 수 없던 때부터 운전이 서툴던 때를 지나 능숙하게 차를 모는 지금까지 그들은 함께 지냈다. 자동차의 라디오에서 <Ya Tara>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웃 여성은 이 노래가 좋다고 말하고 따라 흥얼거린다. 유리는 이 노래의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이웃은 답한다. '우리는 달의 이웃'이라고.

유리는 저 멀리 타워크레인에 있는 디아나와 빛의 언어를 주고받는다. 조명을 켜고 끄는 속도를 조절하며 만들어내는 모스부호다. 유리는 내일 가가린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디아나에게 전하고는 잠이 든다. 꿈을 꾼다. 우주를 향해 발사된 로켓이 산산이 부서져 추락하는 꿈. 눈을 뜨니 엄마가 남긴 메모와 약간의 돈이 있다. 엄마는 유리를 데려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남겼고 유리는 가가린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유리는 우주선을 만든다. 집안 가득 채소를 키우고 까만 천에 수백개의 구멍을 내 그 구멍을 통과하는 빛이 별이 되도록 했다. 실제 우주선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영상을 본다. 유리는 망치로 벽을 부수고 옆집과 그 옆집의 옆집으로 계속 나아간다. 벽을 부술 때마다 새 우주가 등장한다. 벽지도 벽에 걸린 사진도 제각각인, 이제 누구도 살지 않는 각자의 우주. 유리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기울고 회전하면서 유리의 우주선은 무중력의 공간, 우주가 된다. 유리와 디아나는 서로에게 사랑을 말한다. 유리가 높은 곳을 오르며 두려워할 때 디아나는 자기의 스카프로 유리의 눈을 가린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두려움 때문에 올라갈 수 없다. 디아나는 그런 방식으로 유리를 지킨다. 얼마 뒤 디아나도 동네를 떠난다. 디아나가 지내던 아마도 무허가 주택이었을 집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디아나의 가족은 쫓겨났고 유리의 우주에는 더 이상 디아나가 없다. 유리는 우주선에 갇혀 오래도록 외로웠다.

가가린 아파트를 최종적으로 철거하는 날. 옛 주민들이 가가린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꽃을 들고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가가린의 이웃들은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디아나는 아직 가가린 안에 사람이 있다며 철거업체 직원에게 소리를 질러보지만 직원들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 말라며 디아나를 쫓아낸다. 디아나는 유리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유리가 가가린을 떠났을 거라 애써 믿는다. 폭파 직전. 사람들은 함께 숫자를 거꾸로 외친다. 우주로 향하는 로켓을 발사하기 전처럼. 10, 9, 8, 7, 6, 5, 4, 3, 2, 1,


가가린은 주저앉지 않았다. 대신 가가린 건물의 한 층 전체가 빛으로 들어찼고 그 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디아나는 그 빛을 한 글자씩 읽는다. S. O. S. 그 빛은 유리가 보낸 SOS 신호다. 디아나는 유리를 찾아 가가린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유리의 우주선에 유리는 없었다. 흥분한 디아나 앞에 개가 나타난다. 아마도 이 아파트의 이웃이었을 라이카(라이카는 인간보다도 먼저 지구 밖으로 나갔던 개의 이름이기도 하다)였다. 라이카를 쫓아가니 유리가 있다. 알 수 없는 수많은 전선 더미에 깔린 채로 유리는 옥상에 쓰러져있다.

디아나와 가가린의 옛 주민들은 유리를 구조한다. 유리는 바닥에 누워 하늘과 흐릿한 친구들의 얼굴을 동시에 본다. 그것이 유리의 우주다. 영화는 로켓이 발사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끝난다. 그 소리는 가가린 아파트가 주저앉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가가린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실려 흘러간다. 실제 주민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두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가가린>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동네의 커뮤니티 하우스(공용 공간)에서 시나리오 및 연출 워크숍을 몇 차례 진행했는데, 그때 참여한 사람들이 영화 제작팀에도 참여했다". 감독들은 초청받은 영화제에 가가린 주민을 초대할 계획을 세웠지만 팬데믹으로 무산되었다. 대신 가가린 아파트 주변에 있는 작은 영화관으로 주민들을 초대해 함께 영화 <가가린>을 보았다고 한다.

프랑스 공산당의 집권은 길지 않았다. 산업이 쇠퇴하고 이민자가 증가하면서 가가린 아파트를 둘러싼 도시 풍경도 바뀌었다. 공산당 지지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민자에 대한 극우적 정책을 지지했다. 한때 공산당 정권의 자부심이었던 가가린 아파트는 주민들의 처지를 반영하며 무력해졌다. 가가린 아파트의 실업률은 전국 평균치의 두 배가 넘었고 마약 거래 단속을 위해 경찰이 자주 드나들었다.

영화 <가가린>은 가가린 아파트가 얼마나 낡았는지, 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설명하기보다는 가가린 아파트에서의 삶과 가가린 아파트 그 자체를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낡은 아파트와 험난한 삶은 어디에나, 얼마든지 있지만 가가린 아파트의 우정은 우리 곁에 거의 없는 것이므로 가가린 아파트를 노스탤지어로써 말한다. 철거 전 가가린을 둘러싸고 세워진 벽 곳곳에 RIP GAGARINE이 쓰여져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주가 진짜 우주를 말하는 것인지 가가린 아파트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유리가 우주를 그리워하며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유리가 처한 이곳의 광경이 지독해서였으니 유리는 아마 지구 바깥의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일원이라는 것을 종종 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유리는 가가린 아파트라는 우주에서 가가린 아파트 바깥의 우주를 올려다본다. 유리는 우주에서 우주를 짓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모두 우주에서 우주를 짓는 중이다.

실제 가가린 아파트의 철거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습 / 출처 nytimes


https://youtu.be/a7ctmnzJNzE?list=PLg7wkohbELYDawka1khwlNfuvZaRAneRx

Amine Bouhafa, Lena Chamamyan - Ya Tara | Extrait du film "Gagarine"

참고한 자료
김명진, 20세기 기술의 문화사
민용준, ‘가가린’, 어떤 영화는 그렇게 삶을 담아낸다
조한나, [인터뷰] ‘가가린’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투루일 감독, “건축적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
French Housing Project, Once a Symbol of the Future, Is Now a Tale of the Past

두 감독의 단편 <가가린>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vimeo.com/1645877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