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렌타는 냄비의 한 종류일까? 아니면 수프 같은 것? 배송된 책을 앞에 두고 냄비인지 수프인지 모를 폴렌타라는 물체 안에서 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책은 편집자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여러 언어를 알았지만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했던 이가 자신이 택한 언어로 쓴 자전적 글”이자 “이야기가 최소한의 말들을 징검돌 삼아 뛴” 기록이다. ‘자전적’이라는 설명을 보고 작가 연보를 먼저 읽을지 아니면 소설을 읽은 후에 연보를 읽을지 망설였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소설에서 이 순서는 중요할지 모른다. 나는 연보부터 읽기를 선택했다. 그녀는 서커스가 직업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서커스단과 여러 나라를 여행했으며,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 언어를 배웠고 후에 작가이자 배우가 되었다. 1999년, 첫 소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로 발표하고 호평받았지만 곧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시작되었고 2002년 취리히 호수에서 자살했다.
그녀가 이 책을 내고 곧 죽었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어떤 느낌을 더하는가. 연보를 먼저 읽은 이들은 이 소설을 정신병의 ‘전조’로, 혹은 ‘유언’으로 읽고 싶어질 수 있다. 독자가 가져야 할 태도의 정답 같은 건 없지만 나는 작가의 삶과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인과 혹은 연대기처럼 읽게 만드는 힘에 저항하면서 읽는다. 페터라니의 삶에서 이 작품이 갖는 위치나 의미, 이 책을 쓴 이유를 쉽게 추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것이 작품을 충분히 읽는 동시에 작가의 삶 또한 존중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편집자가 밝히듯 이 소설은 최소로 말한다. 단어는 멀찍이 벌어져 있고 그런 만큼 설명은 비어 있다. 무엇이 드러났으며 무엇이 드러나지 않았는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같은, 소설을 읽을 때 굳이 떠올리지 않는 질문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종종 떠오른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며 무엇이든 설명하고자 하지 않는 화자의 태도 때문이다. 어느 문학 교수가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사실 여부의 검증 가능성이라 설명했다. 이를테면 자서전에 나열된 사건은 사실 여부를 검증할 수 있고 자전적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는 간단한 사실에 한해서만 진실일 것이다. 예를 들어 페터라니가 자서전을 썼다면, 그리고 거기에 취리히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쓴다면 그건 가장 손쉽게 사실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종류의 진술이다. 허나 그보다 좀 더 복잡한 ‘사실’이라면?
가야트리 스피박의 『읽기』 서문에는 인도 헌법 19조에 관한 사례가 나온다. 시민의 이동권과 거주권을 명시한 이 조항에는 ‘공익에 따라’ 혹은 ‘지정 부족 보호’를 위해 단행될 수 있는 권리의 제한들 또한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공익에 따라’라는 문구를 읽어내는 방식의 차이가 등장한다. 행정가들은 ‘공익에 따라’ 어떤 주민들을 퇴거시킴으로써 시민의 일부를 공익의 주체가 아닌 자리로 쫓아낸다. 쫓겨난 주민들은 그러한 읽기 자체가 ‘공익’에 정확히 반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삶 자체가 다르게 읽기로부터 파생되는 사실의 분화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르게 읽기에서 기인하는 여러 개의 사실이 있다면, 자서전이라고 하여 그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쉬울리는 없다. 사실은 얼마만큼 명확하고 또 중요한가?
법 앞에서 고통은 상세히, 또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삶의 전반이 사법적 체계에 포섭되어 가는 시대의 우리는 고통에 대한 자세한 진술을 요청받으며 그 과정을 통해 고통을 승인받거나 받지 못한다. 고통이 사실이 되거나 되지 못하는 경로다. 고통을 띄엄띄엄 나열할 뿐인 이 소설은 고통이 어떻게 우리 사이를 오갈 수 있는지 실험한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나의 고통을 쓴다면, 당신은 여기에서 무엇을 읽을 건가요?’라고 묻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읽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자전적’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 소설의 성긴 구성은 기억의 속성과 닮았다. 제멋대로 서 있는 몇 가지 사건들 사이를 다양한 모양으로 연결지어보는 일이 인간의 기억 행위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기억에 진실하게 다가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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