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학경 차의 자기 설명에 대한 급진적 거부*
최근 재출간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학경')의 작품 『딕테( Dictee)』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사로 고통을 표현해야 한다는 압력을 거부한다.
R.O.Kwon(권오경)
* 이 포스팅은 THE NEW YORKER에 실린
권오경 작가의 글 <Theresa Hak Kyung Cha’s Radical Refusal to Explain Herself>를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아티스트인 차학경의 대표작 『딕테』는 1982년 출간됐다. 차학경은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경비원에 의해 강간 살해당했다. 차학경의 글과 마주치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건 차학경이 언어, 비디오, 퍼포먼스, 오디오, 오브젝트를 다뤘고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차학경의 이름을 수호성인이나 선대처럼 언급하는 걸 들은 적이 있기에 10년 전 『딕테』를 집어 들면서 나는 흥분했다. 그때만 해도 차학경보다 먼저 살았던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책을 낸 한국 작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은 선대를 갈망했다. 나 같은 사람, 다시 말해 첫 소설을 쓰고 있는 나 같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도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모으고 싶었다.
차학경은 1951년에 태어나 11살이 되던 해에 가족과 미국으로 갔다. 그녀는 베이 에어리아에서 자랐고 버클리에서 공부했으며 파리에 있는 아트스쿨에 다녔다. 죽음을 맞이하던 즈음의 차학경은 책, 영화, 광고 비평, 손을 재현하는 작품에 몰두 중이었다. 최근 몇 달간 차학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휘트니 비엔날레에 차학경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딕테』 마라톤 읽기가 열렸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주목할만한 사람(remarkable people)"의 "간과(overlooked)" 시리즈 일부로 차학경 부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딕테』와 함께 『Exilée and Temps Morts: Selected Works』가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재출간되었다. 차학경의 이름은 수십 년간 그녀의 작품을 옹호해 온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자, 실험적 문학의 애호가, 개념미술가들의 울타리를 넘어 널리 알려졌다. 한편 차학경의 작품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딕테』는 때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담하고 저항적인 작품으로, 때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다.
분열적이며 획기적인 형식의 『딕테』는 작가 자신의 삶뿐 아니라 그리스 신화, 가톨릭 도상학, 한국의 역사를 포괄한다. 이 책에는 번역되지 않은 한국어, 프랑스어, 중국어도 나온다. 사진, 도표, 이미지에는 설명이 거의 없거나 아예 적혀있지 않다. 누구의 말인지 불분명한 부분도 있다. 내가 처음 『딕테』를 읽었을 때 나는 멈춰서 다시 읽거나 뒤로 되돌아가서 읽곤 했다. 나는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읽을 수 있고 중국어로 쓰인 부분은 부모님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차학경 산문의 시작과 끝 구문은 난감했다. 특징적인 초반의 구절: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p.13)". 뿌리 찾기를 시작하며 넘쳐흘렀던 희열의 감정은 혼란으로 소멸되었고 나는 그녀의 책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다시 집어 들고, 내려놓고, 다시 집어 들었다. 혼란은 매혹으로 바뀌어갔다. 나는 적절한 구문, 설명이나 개념화에 대한 거부가 말하기에서 겪은 어려움의 표현임을 깨달았다. 언어가 억압되거나 다른 언어 세계로 옮겨짐으로써 생기는 어려움이었다. 차학경의 부모는 한국인이었고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만주에서 자라며 일본어와 노동을 강제당했다. 차학경의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왔고 11살의 차학경은 두 번째 언어로 영어를 배웠다. 의도적으로 부서진 『딕테』의 구문은 식민 추방의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캐시 박 홍은 책 『마이너 필링스』에서 자신이 학생들에게 『딕테』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설명한다. 캐시 박 홍은 학생들에게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접근하라고 일러준다.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입속에 치아를 본뜨는 퍼티를 넣어 모음을 찍어내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말이다(마이너 필링스, p.219)". "부서진" 말하기, 또는 유창하지 않은 말하기는 『딕테』 아래에 흐르는 음악이다. "깨어진다는 것. 완벽하게 못하게 구술한다는 것. 완벽하지 못하게 말한다는 것. 완벽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라. 완벽하지 않게 말하라. 완벽하지 못한 말. 피진어(p.173)".
1910년에 시작되어 1945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한국 점령 기간 동안 한국어는 폭력적으로 억압당했고 한국인은 일본 이름을 써야 했다. 외국어로 된 이름을 갖는 대신 자살을 선택한 한국인도 많았다. 한국 문화는 질식당했다. 한국 노래와 태극기 사용이 금지되었다. 2020년에 나온 알렉산더 지(Alexander Chee)의 에세이는 식민지기 이후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인이 되는 법을 다시 배웠는가를 다룬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떤 한국인은 일본어로만 말을 하거나 쓸 수 있었고 어떤 한국인은 태극기의 모양을 잊었다. 알렉산더 지는 한국이 "겪었던 것을 되돌리기 위해 거대한 교육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고 쓴다. 한국인이 되는 것은 한국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일일 수 있다. 아니면 차학경이 썼듯 "목이 잘려진 형상들, 낡은, 흉진, 이전의 형상의 과거의 기록, 현재의 형상은 정면으로 대면해보면 빠진 것, 없는 것을 드러낸다(p.48)".
억압과 고통을 다루는 이야기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폭력의 형태라면 더욱 그렇다. 그녀는 "목격해보지 않은 민족은, 이와 같은 억압으로 지배받아 보지 않은 민족, 그들은 알지 못한다(p.42)"고,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특수 용어들: 원수, 악랄, 정복, 배신, 침략, 파괴(p.42)"라고 쓴다. 미국에서 소외된 몸으로 사는 것, 또 그러한 관점으로 글을 쓰며 사는 것은 자기 역사를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라는 압박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1982년의 차학경은 이러한 압박감에 굴복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줬기에 나 같은 사람이나 한국인 이민자가 그녀의 작품을 접하며 느낀 자유로움의 크기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딕테』의 가장 앞에 수록된 이미지는 검은색 바탕에 써진 몇 줄의 한국어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혼란스럽겠지만 한국어를 아는 사람도 이 이미지만으로 그 의미를 반드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머니 보고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이 문장을 영어로 옮기면 "Mother, I miss you. I’m hungry. I want to go home"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위한 강제 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일레인 김(Elaine H. Kim)과 노마 알라콘(Norma Alarcón)이 엮은 『Writing Self, Writing Nation』에 실린 L. 현이 강(L. Hyun Yi Kang)의 글을 읽으며 나는 한국 강제징용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일본 탄광 벽에 휘갈겨 쓴 글귀 사진임을 배웠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이 사진은 징집된 한국인이 건설한 일본 천황의 새로운 궁전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묘사하고 있다고도 한다.
이 사진의 기원과 관계없이 이 이미지를 보는 사람은 거친 입자와 불분명함을 알아챌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여러 번의 복사 과정을 거치며 명확성과 의미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역사를 전달할 때 발생하는 세부의 상실처럼.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우리와 함께 있다. 언제나 일부를 상실한 채로. 아마 그것에 대한 중대한 이해는 지극히 이해할 수 없는 앎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딕테』의 복잡성은 거리를 두는 것이라기보다는 초대하는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석하기 위해 더 서성대기를. 차학경은 이미지에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식민에 반대하는 열렬한 저항자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흐릿한 사진은 스포츠 행사나 퍼레이드에 참여한 군중처럼 보일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 뮤즈의 이름으로 섹션이 나뉘는데 별도의 이름이 붙지 않은 하나의 섹션이 있다. 또 이 책은 따라오는 오른쪽 페이지에 의해 왼쪽의 산문이 좀 더 명확하게 읽힌다. 이런 분열은 내 가족, 그리고 한국의 과거에 대한 나 자신의 분열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디아스포라 한국인이 그렇듯 우리 가족은 정확히 무엇이 우리를 미국으로 데려왔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며 한국에서의 삶도 말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건 파편뿐이다. 여기에 일화가 있고 저기에 사진이 있고.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브리콜라주다. 부재 자체가 크게 존재한다.
차학경이 언급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은 16세 혁명가 유관순이다. 유관순은 1919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본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미 민족적으로 조직된 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들은 관순의 진지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린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그녀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를 설득해 단념시키려고 했다(p.40)". 그러나 유관순은 "용기를 잃지 않고(p.40)", "1919년 3월 1일 민족적 대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그녀는 40여 군데의 마을을 도보로 여행(p.40)"한다. 이 시위에는 약 이백 만 명의 사람이 모여 행진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투옥된 유관순은 그곳에서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딕테』는 순교에 대한 매혹으로도 가득하다. 『딕테』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성은 잔다르크와 카르멜회에서 추방된 수녀 리지외 성녀다. 신화 속 모녀인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이 책의 가장 상냥한 부분인 차학경과 그녀의 엄마 휘형순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불러내진다. "어머니, 저는 당신을 만나볼 수 있기 위해 꿈을 꿉니다. 잠 속에서는 천국이 가까이 내려옵니다. 어머니, 내 최초의 소리(p.60)". 휘형순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자랐고 한국어 사용 금지를 거역한 대가는 컸다. "말한다는 것은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그리움. 말 한 마디를 발설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특권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모두의 죽음을(p.56)". 점령자들은 "당신에게 그들의 말을 강제로 듣게 하고 그들에게만 말하도록 당신에게 명령합니다(p.61)". 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다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히는 아니라고. 당신은 기다립니다. 당신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p.57)". 일본의 지배가 끝났을 때 휘형순은 곧장 한국으로 갔다. "단 한가지도 가지고 온 것 없이, 사진 한 장, 기억을 회상시킬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어머니의 나라가 해방되는 것을 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p.93)". 고난과 억압에 맞서 싸웠던 한국의, 프랑스의, 그리스의, 역사의, 가족의, 신화의 여성이 모인 이 일족 자체가 일종의 반란이다. 1900년대까지 대부분의 한국 여성은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문맹이었다. 수세기 동안 이어진 족보에 여성은 무명으로 남아있다. 물리적 기록으로부터 제외되었다. 차학경은 자신만의 기록을 세우고 역사에 반하는 글을 쓴다.
차학경은 학제적(interdisciplinary) 모음집인 『Exilée and Temps Morts: Selected Works』를 통해 이 같은 작업을 계속 이어간다. "Exilée(망명자)"와 "Temps Morts"는 서로 연결된 시 연작으로 "Exilée"의 경우 비디오 설치 작품의 첫 번째 부분이고 둘 모두 1980년에 출간된 선집에 인쇄되었다. 이후 2001년 버클리 미술관에서 열린 차학경 회고전을 통해 다시 발행되기도 했고, 이 버전에는 몇 가지 이질적 작품이 추가로 포함되었다: 우편예술(mail art), 시와 사진을 낱장으로 묶은 바인더의 복제, 일기체 내러티브, 더 많은 시, 미완성 영화의 파편 스틸, 프로젝트 설명, 분개(journal entry), 스토리 보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Surplus Novel"이다. 1980년에 처음 물질적 작업으로 구체화되었다. 작은 종이 조각으로 채워진 두 개의 그릇. 한 그릇의 사진은 『Exilee and Temps Morts: Selected Works』에도 실려있다. 그 종이 조각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노래 혹은 시가 인쇄되어 있다.
저들이 나를 부른다
저들이 내 뒤에서 부른다
이봐요 요코
이봐요 요코 오노
요코 오노
요코 오노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 나는
너의 요코 오노가 아니야
비틀즈의 영향이 보이는 이 작품은 캣콜링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길을 걸어가던 차학경은 '요코'라고 불렸는데 이는 아시안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겪는 너무나 익숙한 미국의 인종차별적 모습이다. 노래 가사를 연상시키는 종이 조각과 언어는 장난기로 가득하다. 『딕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면이다. 『Exilee and Temps Morts: Selected Works』를 보는 즐거움 중 일부는 이러한 장난과 유머 감각에서 비롯된다. 에드 박(Ed Park)은 "웃음 가스의 절묘한 흐름이 들어찬 에코 체임버"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훌륭하게 소개했다. 이 책에서 차학경은 그녀를 설명해 보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 놀린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질문받는다
누가 추방당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그 제목
그건 당신을 의미하는지 ( )의/을 위한 설명
이건 왜 언어로되어 있지 않은지 얼마나 오래
그 설명은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의
최근 몇 시간
she is asked with enthusiasm
who is being exiled that is the title what does
it mean who are you what is the explanation of/for
this why is it not in this language how long is it
the explanation today not tomorrow today at the
latest in a few hours
이 모음집에는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소리, 구두점, 형식, 구문의 복잡하고 독창적인 사용에 관심을 기울이며 얻을 수 있는 깊은 즐거움이 있다. 차학경의 삶이 그토록 짧아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할 수 있었을 여러 일을 떠올린다. 고통스럽다. 차학경의 작품은 독창적인 동시에 광범위하기에 그것들을 마주하면 얽힌 상태에서 열린 빈터로 나아가는 느낌이 든다. 여기 있는 것은 충분하지도, 풍부하지도 않다. 차학경은 딕테에서 이렇게 쓴다.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p.153)",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p.153)"
-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https://www.newyorker.com/books/under-review/theresa-hak-kyung-chas-radical-refusal-to-explain-herself
- 이 글은 『딕테』 읽기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차학경에 관한 자료를 찾다 발견하였습니다. 권오경 작가에 대한 관심도 있었습니다. 권오경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미국으로 건너가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권오경 작가의 첫 장편소설 『The Incendiaries』(2018)가 『인센디어리스』라는 제목으로 2023년 1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권오경 작가의 홈페이지 링크를 덧붙입니다. https://ro-kwon.com/
- 『Dictee』 인용 부분에 대한 번역은 2004년 어문각에서 출간된 『딕테』에서 가져왔고, 해당 책의 페이지수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 번역이 부적절할 수 있습니다. 양해 바라며 번역 수정 제안이 있다면 자유롭게 의견을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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